박이재 Ejae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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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Ejae's Note2026.03
오독의 박제
Blow-up

스마트폰의 피사체 자동 인식, 이른바 '누끼' 기능은 화면 속 주인공과 배경을 분리해 내는 꽤나 단호한 장치다. 나는 화면 가장자리에서 잘라낸, 뚜렷한 서사도 중심도 없는 노이즈 조각에 이 기능을 무심히 적용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중심을 찾아내라는듯이.

대상을 찾아내도록 프로그래밍된 AI는 형체 없는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으면서도 어떻게든 억지 윤곽선을 그어 가짜 피사체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것은 기계가 대상을 제대로 인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오독(Misreading)'이자 '환각(Hallucination)'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 기어이 중심을 만들고 위계를 부여하려는 디지털 매체의 강박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은 모순을 만들어낸다. 기계 스스로가 '중요하지 않다'고 버렸던 가장자리의 파편을 또 다시 억지로 '중요한 대상'으로 격상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기계가 스스로 범한 이 시각적 오류와 환각을 반복하고 복제하여 대형 캔버스 위에 박제하기로 했다.

이 거대한 반복은 시선을 한 곳에 붙잡아두려는 기계적 시선의 특성을 무너뜨린다. 똑같은 파편들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기에 관람자는 화면 안에서 단일한 초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배회한다. 한 단어를 계속 반복해 말하면 어느 순간 그 의미가 사라지고 기묘한 소리만 남듯, 반복되고 복제된 형태 앞에서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정보를 해독하려는 의지를 자연스럽게 내려놓게 된다.

의미를 파악하려는 목적이 사라진 자리에는 형태와 색채라는 순수한 감각만이 남는다. 기계는 늘 특정 대상을 보도록 우리를 훈련시켜 왔지만 나는 그것을 화면 가득 복제하는 방식으로 그 강요된 시선을 흐트러뜨린다. 무의미한 반복을 통해 형태를 지우고 순수한 감각으로 전이시키는 것. 이는 우리가 오랫동안 학습되어 온 비인간적인 응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이기도 하다.

2025
Ejae's Note2025.04
Blow-up; explode. enlarge a photograph or text.
Blow-up

작업은 스마트폰 액정 위에서 두 손가락을 벌리는 사소한 습관에서 시작되었다. 보통은 무언가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한 행동이지만 내가 확대하는 행위는 조금 다른 목적을 향한다. 이미지를 세밀히 확인하고 싶어서라기보다 그것이 어디까지 견디는지 시험하듯 화면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면 그것은 선명해지는 대신 픽셀 단위를 드러내며 뭉개지고 형태는 산산조각이 난다.

이 시리즈의 제목이기도 한 '블로우업(Blow-up)'. 사진을 크게 확대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무언가 거칠게 터져버린다는 '폭발'의 의미도 품고 있다. 고해상도의 매끄러운 이미지가 스크린 끝까지 당겨질 때 그 세계는 구체적인 정보를 내어주는 대신 거친 입자로 폭발하며 마치 시각적 붕괴를 일으키는 것 같다. 폭발 직후의 잔해처럼 화면에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형체와 빛의 조각들만이 흩트러진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동명 영화 <욕망, Blow-Up> (1966) 속 사진가가 떠오른다. 그는 우연히 찍은 공원 사진 속에서 범죄의 증거를 찾으려 필름을 집요하게 확대하지만, 인화지가 커질수록 그가 쫓던 진실은 거친 입자 속으로 해체되어 버렸고 남은 건 식별할 수 없는 얼룩뿐이었다. 내 작업도 그 지점에 서 있다. 2억 화소의 촘촘한 이미지를 파고들수록 현실의 견고함은 무너지고 모호한 픽셀의 껍질만 남는다.

나는 그 흐릿해진 경계 혹은 온전한 것이라곤 없는 어떤 잔해의 현장을 건져내고 있는 듯 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 모호함이 불러일으키는 착시로 인해 시각적 확증 편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형태가 무너지고 객관적 정보가 사라진 그 빈 틈새를 우리는 각자의 관점으로 메우게 된다. 실재가 지워진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 보고 싶은 것을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jae's Note2025.05
기계적 시선
기계적 시선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는 순간 2억 화소의 센서는 빛을 받아들이지만 자동 초점 시스템은 그 안에서 가차 없이 위계를 세운다. 렌즈는 인물이나 주요 피사체를 감지해 선명한 주인공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배경은 흐릿하게 노이즈로 처리해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 이는 단순히 광학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엇을 '볼 만한 것'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기계적 판단의 결과에 가깝다.

이 렌즈의 선택 방식이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디지털 플랫폼의 논리와 꽤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추천 알고리즘 역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플랫폼은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할 만한 중심부의 이미지만을 정교하게 선별해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면의 방대한 세계는 보여주지 않는다. 클릭 수와 체류 시간으로 환산되는 이 세계에서 시각 정보는 주목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철저히 양분된다.

우리는 이 시스템이 제공하는 화면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상 우리의 눈은 기계가 설계한 비인간적 응시에 길들여져 있다. 카메라는 광학적으로 플랫폼은 데이터적으로 세계를 위계화하며 우리의 시야를 교묘하게 통제한다. 알고리즘과 센서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시각 환경은 우리가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조차 의심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고해상도의 선명함을 선사하는 것 같지만 역설적이게도 완벽하게 설계된 맹점(Blind spot)으로 안내한다. 기계가 초점을 맞추지 않은 곳, 알고리즘이 보여주지 않은 영역은 물리적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지적 시야에서 삭제된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좁고 선명한 세계에 갇히면서 그 바깥에 실재하는 거칠고 불투명한 날것의 풍경들을 망각해 가는 것이 아닐까.

Ejae's Note2025.07
주변부 채집
주변부 채집

오늘날의 고해상도 카메라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선다. 렌즈는 촬영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2억 화소의 정밀함으로 전방의 모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인다. 친구와의 셀카나 식탁 위 음식 사진을 찍을 때 우리의 뇌와 카메라의 알고리즘은 중심 피사체에만 몰두하지만 기계적 눈(카메라 렌즈)은 그 배경에 놓인 유리잔의 왜곡된 굴절이나 저 멀리 있는 모르는 이의 순간적인 표정까지 적나라하게 포착해 둔다.

나는 바로 이 지점, 기계의 자동초점 시스템이 배경으로 밀어내고 우리의 인지 체계가 불필요하다고 배제했지만 동시에 고화질로 저장해버린 주변부를 탐색한다. 연출하거나 조작한 이미지가 아닌 일상적 사진들을 작업의 소스로 활용하는데, 이것에는 의도치 않은 우연과 통제되지 않은 빛의 산란 그리고 촬영되는 찰나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타인의 흔적들이 '노이즈'라는 이름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이 작업에서 ‘채집’이란 소재 찾기를 넘어 쌓여가는 이미지 더미에서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았던 잉여의 데이터를 회화의 주체로 복권시키는 '발굴'이 된다. 그 가장자리의 틈새에서 매일 새롭게 그릴 것을 발견하는 중이다.

Ejae's Note2025.08
CROP
CROP

채집된 이미지는 절단(Crop)과정을 거친다. 거대한 원본 이미지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사각의 프레임으로 오려낸다. 이는 이미지가 품고 있던 서사나 백그라운드로부터의 단절이기도 하다. 화면 귀퉁이에서 발견한 픽셀 덩어리를 회화적 프레임으로 잘라내면, 이미지는 원본이 지니고 있던 서사적 맥락—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찍었는가—으로부터 이탈된다.

어느 물놀이장 풍경 속 어린이의 초상은 거미줄로 가려진 미지의 얼굴이 되고, 식탁 위의 유리잔은 일상적 정물이 아닌 빛의 반사체가 된다. 이로써 대상은 그만의 고유한 내용과 단절된 채 순수한 감각적 표면으로 다뤄진다.

이렇게 맥락이 소거된 파편은 관람자에게 감상의 자유를 허락한다. 설명되지 않는 이미지의 단면 앞에서 보는 이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 세계를 자신만의 상상으로 메운다. 이 작업에서의 '크롭'은 정보 삭제라기 보다, 그림 바깥의 여백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Ejae's Note2025.10
픽셀의 물성화
픽셀의 물성화

스마트폰 액정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넘기면 그만인 희박한 존재들같다. 나는 이 비물질적인 데이터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물리적인 피부를 갖게 되는 과정을 회화라는 이름으로 가시화한다.

이 과정에서 주재료인 세라믹 미디엄은 붓끝에 묵직한 저항감을 주며 매끈했던 디지털 화면의 감각을 거칠고 요철이 있는 표면으로 바꿔놓는다. 나는 이 거친 물성을 이용해 디지털상의 노이즈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촉각적 실재로 치환하는데 흥미를 느낀다.

찰나에 소비되고 쉽게 삭제될 것같던 디지털 파편들이 내 육체 노동을 거쳐 화면 위에 겹겹이 쌓이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지루하고도 집요한 시간이 흐르면 이미지는 고유한 실재감을 가진 존재로 탄생한다. 나에게 회화는 휘발될 뻔한 데이터로써의 이미지를 ‘그리기’라는 터널을 통과시켜 물리적 현실 세계로 정착시키는 과정이다.

Ejae's Note2025.12
CODE Resolution
CODE Resolution

작업의 제목에는 언어 대신 <383×479>, <194×271>과 같은 숫자의 나열이 붙는다. 이것은 곱셈수식이나 암호가 아니라 내가 도려낸 이미지 조각의 실제 해상도(Resolution)값이다.

2억 화소(200MP)라는 방대한 디지털 원본의 세계에서 내가 선택한 이미지 조각은 고작 수백 픽셀에 불과한 데이터로 보인다. 이 초라한 숫자를 작품의 제목으로 명명한 것은 눈앞의 거대한 회화가 사실은 아주 작은 '디지털 조각'에서 유래했음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이 제목의 형식은 이미지의 내용(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이미지의 상태(얼마나 확대되고 깨졌는지)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발언한다. 캔버스 위에 쌓인 재료의 육중한 물질성과 작고 가벼운 데이터값의 숫자는 묘한 대비와 긴장을 이루며 조화한다.

2024
Ejae's Note2024.02
하자점검
하자점검

전셋집으로 이사 전 하자 점검은 지극히 기능적이고 사무적인 절차였다. 바닥의 미세한 스크래치, 마모된 모서리, 벽지의 작은 주름을 찾아내고 이를 샅샅이 기록해 증거물로 남겼다. 이 과정에서 흔적들은 '하자'라고 명명되고 안전과 미관 혹은 경제적 가치를 해치는 결함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낯선 의구심과 함께 이내 그 흠집의 시각적 존재감에 사로잡혔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구석진 곳의 흠집들을 기록하며 자문했다. ‘이 작은 구멍과 얼룩들은 왜 실패의 증거로서만 존재해야 할까’. 매끈하게 마감된 흰 벽이 정상이라면 그 위에 남은 못 자국 하나는 시스템의 질서를 위협하는 불청객인 셈이었지만 돋보기를 대듯 렌즈를 가까이 가져갔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를 드리우는 대리석의 파편, 벽지의 입자 사이로 스며든 얼룩의 농담은 그만의 독특한 조형성을 지니고 있었다.

공간의 가치를 훼손 시키던 그 흔적들은 사실 그 공간이 견뎌온 시간과 물질성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스템이 정한 질서에서 밀려난 이 '주변부'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왔는지 묻는다. 나는 이 사소한 풍경들을 회화라는 느린 매체로 옮겨와 그것들도 마땅히 누릴 만한 미적 지위를 복원해보고자 했다.

Ejae's Note2024.05
증거가 되지 못한 사진들
증거가 되지 못한 사진들

원래 이 사진들의 용도는 명확했다. 계약기간 후 전셋집에서 이사를 나갈 때, 내게 책임을 묻지 않도록 집주인에게 보낼 증거사진들이었다. 벽의 못 자국, 바닥의 찍힌 자국, 문틀의 파인 자국 등의 흠집들을 가장 건조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로써, 제거되거나 보수되어야 할 대상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이 사진들이 가진 유일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고 사진들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미묘한 감상이 일었다. 문제 있는 결함으로만 보였던 흠집들이 어느 순간 고유한 조형성을 가진 이미지로 다가왔다. 벽지의 어긋난 패턴 모양은 비정형적인 선과 면의 구성으로, 바닥에 떨어진 페인트 얼룩은 회화적 농담으로 읽히기도 했다. '고쳐야 한다'는 기능적 판단을 멈추고 '들여다보고 싶다'는 미적 호기심이 들어선 것. 원래는 안전이나 미관상의 이유로 관리와 제거의 대상이 되었던 존재들이 이제는 색과 선, 질감이 발현되는 회화적 요소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진들을 하자점검 리스트에 묻어놓는 대신, 캔버스로 옮겨올 장면으로 다시 분류했다. 구체적인 장소나 상황을 설명하는 정보는 탈락되고 화면 안에는 오직 그 추상적 형태와 질감만이 남았다. 사회적 기준에서 오류나 쓸모없는 것으로 분류되던 주변부의 존재가 시선의 주인공이 되어 그림의 중심으로 들어온 하나의 사건이 된 것이다.

Ejae's Note2024.11
수행의 기록
수행의 기록

우리의 공간을 두르고 있는 벽지나 마룻바닥, 몰딩 같은 자재들은 기계가 토해낸 공산품들이다. 무한히 복제되는 이 대량 생산에는 누군가의 깊은 시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흠집이 나면 너무나 쉽게 교체되거나 버려진다.

하자 점검 과정에서 이 흔적들의 존재 방식 역시 가혹하다. 세입자에게 "여기가 깨졌으니 보상하라"고 들이대는 법적 증거이자 가능한 한 빨리 수리되어 사라져야 할 임시적 오류로 취급된다. 나는 이러한 하자의 기록에 고발과 지시의 목적을 지우고 회화의 시간을 태우면서 그것을 더욱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나의 붓질은 집착에 가깝다. 기계가 찍어낸 바닥재의 미세한 결부터 대리석의 패턴, 심지어 벽지 프린트의 요철까지 매우 세밀한 필치로 묘사한다. 이때 나는 그림 안에서 '하자'와 '성한 부분'을 공평하게 대한다. 보통의 시선에서 흠집은 도려내야 할 대상이지만 나의 캔버스 위에서 그들은 똑같은 양의 시간과 정성을 부여받는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한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동등한 밀도로 그려낸다.

지워져야 했던 흔적들은 반복된 붓질을 통해 화면 위에서 존재가치를 얻는다. 캔버스에 옮겨진 하자는 더 이상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볼 만한 장면이 된다. 하찮은 것을 위해 쏟은 작업자의 수개월의 시간을 느끼며 효율과 완벽만을 강요하는 우리의 기준을 잠시나마 멈추는 장면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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